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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티트가 세상을 떠났다(사진=애틀랜타 호크스 SNS)[더게이트]
미 프로농구(NBA) 역사상 최초로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던 '전설의 빅맨' 밥 페티트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페티트의 모교인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LSU)는 25일(한국시간) 페티트가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대학 측은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다. 1932년 12월 12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태어난 페티트는 1954-1955시즌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전신인 밀워키 호크스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1964-1965시즌 은퇴할 때까지 11시즌을 오직 호크스에서만 뛴 대표적인 '원클럽맨'이었다.
현역 시절 페티트는 골밑을 지배하는 거인이었다. 1955-1956시즌 평균 25.7점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이해 제정된 NBA 최초의 정규리그 MVP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958-1959시즌에도 평균 29.2점으로 득점왕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올스타전 MVP 역시 네 차례나 차지했는데, 이는 훗날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만이 이룬 대기록이다.
특히 1957-1958시즌 파이널이 페티트 농구 인생의 정점이었다. 당시 미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가장 강력한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호크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보스턴이 10시즌 동안 9차례 우승을 차지하던 독주 체제에 유일하게 제동을 건 주인공이 바로 페티트였다. 파이널 무대에서 보스턴과 총 네 차례 맞붙었으나, 1957년(7차전 2차 연장 패배)과 1960년(7차전 패배), 1961년(5차전 패배)에는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포워드 혁명가'…코트 밖 금융인으로 제2의 삶키 206cm, 몸무게 93kg의 탄탄한 체격을 지녔던 페티트는 현대 농구 파워포워드 포지션 개념을 확립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골대를 등지고 몸싸움만 벌이던 당시 센터들과 달리, 골대를 마주 보고 던지는 정면 슛과 기동력을 겸비한 최초의 빅맨이었다. 11시즌 내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올스타에 뽑혔을 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도 돋보였다.
페티트는 통산 평균 26.4득점, 16.2리바운드를 남기고 1965년 코트를 떠났다. 은퇴 당시 통산 2만 880득점으로 NBA 역대 1위, 1만 2849리바운드로 역대 2위였다. 은퇴 뒤에는 고향 배턴루지로 돌아가 은행원 및 금융 컨설턴트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도 LSU와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농구 명예의 전당은 페티트에 관해 "포워드 포지션에 혁명을 일으킨 매끄럽고 노련한 빅맨이자 농구계의 진정한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명예의 전당 프로필에는 "날씬하고 우아하며 늘 완벽한 몸 상태를 유지했던 페티트의 체격은 골대를 마주 보고 플레이하는 최초의 빅맨을 탄생시켰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지독한 훈련량과 투지가 그를 동료들과 구분 짓는 핵심이었다"고 적혀 있다. 페티트는 197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친정팀 애틀랜타 호크스도 성명을 냈다. 구단은 "고인이 우리 구단과 농구 역사에 남긴 공헌에 감사한다. 고인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세대의 선수와 팬들에게 영감을 주는 탁월함의 기준을 세웠다. 그의 끊임없는 근면성, 투지, 그리고 농구에 대한 헌신은 우리 구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면서 "전 세계 농구계와 함께 결코 잊혀지지 않을 그의 놀라운 삶과 유산을 기리며 추모한다"고 애도했다.
페티트의 등번호 9번은 애틀랜타 구단에서, 등번호 50번은 모교인 LSU에서 나란히 영구결번됐다. 애틀랜타는 "영구결번된 9번 유니폼은 팀에 남긴 족적을 영원히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홈구장 스테이트팜 아레나에 걸려 있을 것"이라고 했다. LSU 홈 경기장 밖에는 피트 마라비치, 샤킬 오닐과 함께 페티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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