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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에서 웃음은 감상이라기보다 판단에 가깝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웃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기준을 세운다.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어색한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나눈다. 맥스 시덴토프의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기준을 작품 밖에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품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상하다고 받아들이는 관객의 시선까지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입구에 적힌 문장은 전시 전체의 방향을 예고한다.
“이곳은 작가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전시의 시작점입니다. 그에게 유머는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 맥스 시덴토프 개인전 中
전시는 관객에게 웃으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예술과 장난 사이의 경계를 넘게 하고 익숙한 현실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통과하게 만든다. 출구는 있지만 탈출은 아직 불가능하다는 문장도 남아 있다. 전시장을 빠져나와도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뜻처럼 읽힌다.


서울 중구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에서 열린 맥스 시덴토프 개인전은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등을 넘나드는 작업으로 구성됐다. 데미안 허스트, 론 뮤익을 잇는 차세대 현대미술 작가로 소개된 그는 젠틀몬스터와 블랙핑크 제니 협업으로 국내 아트신에도 이름을 알렸다.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지루한 일상을 낯설게 비틀고 그 안에 날카로운 유머를 담은 작업으로 구찌, 나이키, 애플 등 글로벌 브랜드와도 협업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작업 세계를 아시아에서 대규모로 소개하는 개인전이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다른 무대와 상황을 여행하듯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놓였다.
전시가 붙잡는 것은 비정상적인 장면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고 흔들리는지 보여준다. 정상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연출된 질서다. 맥스 시덴토프 전시는 그 질서를 우스꽝스럽게 비틀며 작품보다 그것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관객의 시선 자체를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 질문은 챕터2 ‘FRIENDS’에서 먼저 또렷해진다. 실제로 이 공간은 작가가 친구, 동료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들로 구성됐다.


이 공간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여권 사진처럼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정면을 응시하는 평범한 증명사진처럼 보인다. 표정은 절제돼 있고, 배경은 단순하다.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찍힌 사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뒤로 물리면 전혀 다른 장면이 드러난다. 얼굴 아래로 이어진 전신은 평범한 여권사진의 규칙을 벗어나 있다. 누군가는 몸에 테이프를 감고 있고 누군가는 비현실적인 자세로 서 있다. 처음에는 규격화된 초상처럼 보였던 이미지가 한 발 물러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바뀐다.
이 변화가 흥미로웠다. 얼굴만 볼 때는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전체를 보면 그 판단은 곧 흔들린다. 한 사람을 설명한다고 믿었던 정면 사진은 사실 아주 작은 단서에 불과했다. 얼굴은 가장 직접적인 정보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몸짓과 상황, 맥락이 드러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나의 간단한 예시나 지시가 주어진 듯하지만 결과물은 모두 다르다. 화분에 한 발을 넣고 포즈를 잡는 예시 사진 하나에 누군가는 화분을 공으로 바꾸기도 하고 누군가는 넘어지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추가하기도 했다.
두 남성이 악수하는 예시 사진 하나에도 누군가는 손이 주는 의미를 확대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두 남성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는 점을 집중해 완전히 새로운 사진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음에도 여덟 개의 사진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벌어진다. 같은 조건 안에서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반응과 해석을 내놓는다.
이 챕터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우정이나 협업을 낭만적으로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께 만든다는 일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보여준다. 가까이서 보면 비슷해 보이는 얼굴도 멀리서 보면 완전히 다른 몸과 상황을 갖고 있다. 같은 아이디어를 받아도 각자가 내놓는 결과는 다르다. 관계는 자연스럽고 단순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선과 해석이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복잡한 장면이다.
이 지점에서 전시는 단순한 유머를 넘어선다. 작품이 이상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쉽게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들로만 사람과 상황을 판단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웃음이 멈칫하게 된다. 얼굴만 보고, 이름만 보고, 관계의 제목만 보고 안다고 믿었던 것들이 한 발 물러서는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챕터2 ‘FRIENDS’에서 전시된 것은 사람을 하나의 이미지로 정리하려는 관객의 시선도 함께 놓여 있었다.

이 질문은 챕터5 ‘BEWARE OF REALITY’에서 더 직접적인 형태로 이어진다. 벽에 크게 적힌 문구는 현실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보통 전시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공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 문구 앞에서는 반대로 느껴진다. 조심해야 할 것은 비현실적인 작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믿어온 세계일 수 있다.


챕터5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작품 중 하나는 흰 알들이 줄지어 놓인 ‘선천적 vs 후천적’이었다. 겉으로 보면 모두 비슷한 알이다. 크기와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employee’, ‘joker’, ‘right-winger’, ‘intellectual’, ‘mistress’ 같은 단어들이 붙어 있었다. 같은 형태의 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분류되는 순간, 작품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사람을 볼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를 직업, 성향, 계급, 역할, 성격 같은 말로 빠르게 분류한다. 그 분류는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가 만들어낸 이름표에 가깝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알 자체가 특별히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모두 비슷한 알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타인을 바라보는 익숙한 습관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알은 그대로 있다. 이름표가 붙는 순간 다르게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정상과 비정상, 유능함과 무능함, 주류와 비주류로 가르는 기준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닐 수 있다. 반복해서 붙이고 믿어온 사회적 언어가 그 사람을 특정한 자리로 밀어 넣는다. 이 작품은 그 과정을 조용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름 하나가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곱씹게 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이 작품을 오래 바라보던 관람객 최 씨는 엄청난 수의 알들의 모습과 그 아래 붙여진 이름표들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만 했는데, 후에는 묘하게 불편함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는 "처음에는 수많은 알에 이름을 붙여놓은 모습이 장난스럽게 느껴졌는데, 하나씩 이름표를 읽다보니 똑같이 생긴 알임에도 이름표 하나가 주는 느낌이 이렇게 크다는 게 신기했다"고 했다.

같은 챕터에 놓인 ‘민주주의’라는 작품도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진다. 세 개의 투표 부스 안에는 사람이 들어가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부스 아래로 드러난 다리와 바지뿐이다. 민주주의라는 무거운 단어와 달리 장면은 우스꽝스럽다. 투표라는 엄숙한 행위가 갑자기 허술하고 인간적인 이미지로 바뀐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조롱하는 방식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민주주의의 한 표가 누구에게 주어지는지 묻는다.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아무 준비가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투표 부스 아래로 드러난 바지는 그래서 웃기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의 핵심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겉모습이나 태도, 준비 정도와 상관없이 각자는 하나의 표가 주는 권리를 온전히 가진다.
이 작품은 정상적인 시민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사람들’만의 제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정보, 감정, 판단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무게의 선택권을 갖는 제도다. 작품 속 인물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수록 질문은 더 선명해진다. 어떤 사람을 민주주의의 자격 있는 주체로 상상해왔는가. 그 기준은 정말 정당한가.
두 작품은 전시가 말하는 ‘현실 조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반듯한 질서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름표와 분류, 자격과 기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시선이 촘촘하게 놓여 있다. 시덴토프는 그것을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알을 줄 세우고 투표 부스 아래로 다리만 보이게 한다. 웃기고 단순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단순함 때문에 기준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시를 따라 걷다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인다. 관계, 신원, 역할, 제도, 현실이라는 익숙한 질서가 조금씩 비틀린다. 모두 일상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이다. 익숙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시덴토프는 그것을 낯선 무대 위에 다시 올린다. 관객은 웃다가 멈춘다. 웃음의 대상이 작품인지 자신이 믿어온 기준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현대인은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을 계속 편집한다. 증명사진처럼 얼굴을 정리하고 관계를 이름 붙이고 사회가 기대하는 시민의 모습에 맞춰 선다. SNS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상마저 연출된다. 직장에서는 감정을 조절한다. 관계 안에서는 어색함과 허술함을 감춘다. 실패하거나 우스꽝스러워지는 순간은 가능한 한 지운다.

이 전시는 그 지운 장면들을 다시 꺼내놓는다. 이상한 얼굴, 어긋난 자세, 과장된 상황, 허술한 몸짓은 작품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지워진 인간의 모습이다. 관객은 그것을 보고 웃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질문이 남는다. 왜 저 모습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가. 왜 저 장면을 비정상으로 분류했는가. 그 기준은 정말 자연스러운가.
맥스 시덴토프 개인전은 비정상적인 장면을 모아놓은 전시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고 흔들리는지 보여주는 전시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웃지만, 그 웃음은 작품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시가 끝난 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상한 것은 작품인가, 아니면 그것을 이상하다고 판단한 우리의 시선인가. 시덴토프의 유머가 가볍게 소비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웃음을 통해 ‘정상’이라는 가장 익숙한 질서를 낯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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