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 현장서 술 마시고 11㎞ 운전한 여성…법원은 ‘무죄’ 선고했다

성폭행 피해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신 상태로 11㎞를 운전한 여성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당시 다른 방법으로 현장을 빠져나가기 어려웠던 점 등을 고려해 여성의 음주운전을 ‘긴급피난’으로 판단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연합뉴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청주지법 충주지원 형사1단독 김연수 부장판사는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 씨는 지난해 6월 충주의 한 숙박업소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094% 상태로 차량을 운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숙소에서 잠을 자던 A 씨는 자신이 준강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잠에서 깼다. A 씨는 급히 옷과 소지품을 챙겨 숙소를 빠져나와 차량에 탔다.

이 과정에서 가해 남성이 A 씨를 뒤쫓아왔다. A 씨는 그대로 차량을 출발시켜 약 11㎞를 이동했고 이후 갓길에 차를 세운 뒤 경찰에 성범죄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쟁점은 A 씨가 술을 마신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은 행위에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였다. 법원은 당시 A 씨의 상황에 주목했다. 숙박업소가 외진 곳에 있었고 새벽 시간이라 주변에서 도움을 받을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던 것으로 조사됐다. 택시나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거나 걸어서 현장을 빠져나가는 방법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이에 재판부는 A 씨가 준강간 범행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전한 행위를 ‘긴급피난’으로 인정했다.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음주운전이었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위법성을 인정해 처벌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A 씨를 상대로 준강간 범행을 저지른 남성은 최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음주운전인데도 무죄…‘긴급피난’이란

이번 판결의 핵심은 형법상 ‘긴급피난’이다. 현행 형법 제22조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법익에 닥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생명이나 신체, 자유, 재산 등에 즉각적인 위험이 닥쳤을 때 이를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다른 법익을 침해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만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위법 행위가 긴급피난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은 위험이 실제로 현재 존재했는지, 다른 현실적인 방법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선택한 피난 방법이 필요 이상의 피해를 일으키지 않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핀다. 대법원 판례에서도 긴급피난이 인정되려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수단의 필요성과 피해의 최소성, 보호되는 이익과 침해되는 이익 사이의 균형 등을 따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만으로 음주운전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시 위험의 정도와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할 가능성, 운전 거리와 경위 등 여러 사정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법원이 공개한 판결 사례 가운데는 대리기사가 경사진 도로에 차량을 두고 떠나 사고 위험이 발생하자 술을 마신 사람이 차량을 약 10m 이동한 사건에서 긴급피난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한 사례도 있다. 당시에도 차량을 그대로 둘 경우 발생할 위험과 이동 거리, 다른 방법을 즉시 선택하기 어려웠던 상황 등이 함께 고려됐다.

이번 사건에서는 성범죄 피해 직후 가해 남성이 뒤쫓아오는 상황이 이어졌고 숙소가 외진 곳에 있어 새벽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택시·대리운전 등을 이용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법원은 음주운전이라는 행위 자체만 따로 떼어 판단하지 않고 A 씨가 당시 처했던 구체적인 위험과 현장을 탈출할 다른 현실적인 방법이 있었는지를 함께 따져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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